
퇴직연금 15억, 계산원이 만든 놀라운 숫자
이직이 당연해진 시대입니다. 2~3년마다 회사를 옮기는 것이 커리어 관리의 정석처럼 여겨지고, ‘평생직장’이라는 단어는 이제 옛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례가 최근 화제가 됐습니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한 코스트코 매장에서 40년 가까이 계산원으로 근무한 토니 바자르(60)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확정기여형 퇴직연금 계좌에는 1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5억원이 쌓여 있습니다. 특별한 투자나 부업이 아니라, 오직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성실히 일한 결과입니다.
이 사연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평생직장’은 정말 사라진 개념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그 가치를 너무 빨리 잊어버린 걸까요?
카트를 모으던 청년, 40년 후 회사의 자산이 되다
바자르는 1986년, 코스트코의 전신인 프라이스클럽에 시급 5.85달러를 받고 입사했습니다. 첫 업무는 주차장에 흩어진 쇼핑 카트를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자리였죠.
이후 새벽 상품 진열, 매장 입구 안내를 거쳐 계산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회사가 여러 차례 관리직 승진을 제안했지만 그가 매번 거절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고객을 직접 응대하는 일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코스트코의 독특한 인사 문화가 있습니다. 회사는 바자르 같은 장기근속 직원의 경험을 신입 교육에 적극 활용합니다. ‘컬처 코치’라는 공식 멘토 제도를 통해 베테랑 직원이 신규 직원에게 업무 방식과 기업 문화를 전수하는 것이죠. 승진하지 않고도 존중받고 성장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현재 그의 시급은 32.90달러로, 미국 계산원 평균보다 약 70% 높습니다. 40년간 쌓인 본인 납입금과 회사 지원금, 투자 수익이 합쳐져 15억원이 넘는 퇴직연금 자산이 만들어졌습니다.
위기의 순간, 회사가 진짜 힘이 될 때
숫자보다 더 인상적인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지난해 바자르의 아내가 3기 뇌종양 진단을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아내는 세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회사의 의료보험이 실질적인 도움이 됐습니다. 바자르는 아내를 돌보기 위해 약 1년의 유급휴가를 지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든 은퇴할 수 있지만, 코스트코는 나에게 잘해줬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은퇴가 가능한 상황이지만, 그는 여전히 매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회사에 대한 신뢰가 단순한 급여 이상의 것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코스트코는 왜 이렇게까지 투자할까
이 모든 걸 단순한 미담으로 넘기기엔, 그 이면에 있는 경영 전략이 꽤 치밀합니다.
첫째, 숙련도는 곧 생산성입니다. 코스트코의 숙련 계산원은 시간당 평균 57명, 빠른 직원은 70명 안팎의 고객을 처리합니다. 오래 일한 직원일수록 처리 속도와 응대 능력이 향상된다는 뜻입니다.
둘째, 채용 비용 절감 효과입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소매업 현장 직원 한 명을 새로 채용하고 교육하는 데 평균 1만 달러가 든다고 분석했습니다. 직원을 오래 붙잡아두는 것이 결국 비용을 아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셈입니다.
셋째, 실제 수치가 이를 증명합니다. 입사 후 1년 이상 근무한 코스트코 직원의 이직률은 약 7%에 불과합니다. 업계 평균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입니다.
코스트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직원 처우를 개선해 이직률을 낮춘 기업은 코스트코뿐만이 아닙니다.
월마트 계열의 회원제 할인점 샘스클럽은 2019년부터 핵심 직원 약 2만 명의 시급을 인상하고 고정 근무제를 도입했습니다. 그 결과 직원과 관리자의 이직률이 낮아졌고, 노동생산성과 순매출이 함께 증가했습니다.
미국의 진단검사 기업 퀘스트다이애그노스틱스도 임금과 교육 체계를 개선한 뒤, 입사 첫해 직원 이직률을 60%에서 16%로 크게 낮췄습니다.
이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직원에게 투자한 만큼, 기업도 안정적인 성과로 돌려받는다는 것입니다.
숫자로 보는 코스트코의 성과
이런 전략이 실제 실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코스트코의 2025회계연도 순매출은 2,699억 달러로 전년보다 8% 증가했고, 순이익은 81억 달러로 10% 늘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회원 갱신율은 92.3%, 전 세계 갱신율은 89.8%에 달합니다.
다만, 이 모델이 만능은 아니다
물론 높은 임금과 복지가 항상 실적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성 향상이 뒤따르지 않으면, 경기 침체기에는 오히려 기업의 비용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코스트코도 공식 보고서를 통해 업계 평균보다 높은 보상 수준을 유지하는 데 따른 비용 부담이 수익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모델을 무조건적인 정답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전략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다
우리는 흔히 ‘평생직장’을 낡은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산업 구조 속에서 한 회사에 오래 머무는 것이 오히려 손해라는 인식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직을 통해 연봉을 올리고, 커리어를 확장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이는 시대니까요.
하지만 토니 바자르의 사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특별한 능력이나 학벌, 인맥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그저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여 15억원이라는 숫자로, 또 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든든하게 작동한 의료보험과 유급휴가라는 형태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이 모델이 모든 사람, 모든 직장에 통하는 정답은 아닙니다. 코스트코처럼 장기근속을 제도적으로 보상하는 회사는 여전히 드뭅니다. 승진을 거절해도 존중받을 수 있는 문화, 오래 일한 사람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구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사연이 던지는 질문은 개인을 향한 것만은 아닙니다.
‘평생직장’이 다시 의미를 가지려면, 성실하게 오래 일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만큼 보상하는 기업의 시스템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다시 고민해야 할 것은 개인의 근속 여부가 아니라, 그런 근속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직 문화일지도 모릅니다.